오래 된 클리셰, 기억상실증 주인공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곧잘 기억상실증에 걸린 주인공이나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교통사고를 당한 뒤 병원에서 깨어나 보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물론 병문안을 오는 친구들이나 가족들, 심지어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까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모습을 통해 애틋하거나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인물은 오래 전부터 여러 창작물에서 등장하던 캐릭터 설정 중 하나입니다. 어떤 충격적인 사건을 겪은 이후 그 사건에 대해 기억하지 못하거나 사건 전 또는 후를 기억하지 못하는 설정도 자주 등장합니다. 하루, 일주일, 일년 등 주기적으로 기억이 리셋되는 인물도 있고, 스릴러 장르나 판타지 장르에서는 특별한 수단이나 마법과 같은 것에 당해서 인위적으로 기억을 잃었다는 설정도 많습니다.
영화나 드라마, 소설, 만화 등의 창작물에서는 이처럼 기억상실증에 걸린 주인공이나 그 외 캐릭터를 통해서 애틋함이나 안타까운 마음을 유발하거나 긴장감을 더 극대화시키는 연출을 종종 사용합니다. 기억은 나의 삶과 자아에 지대한 영향을 주기 때문에 그것을 잃는다는 상황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더 많은 감동이나 우려를 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기억상실증이라는 소재는 여러 작품에서 꾸준히 활용되면서 일종의 클리셰로 자리 잡았습니다. 최근에는 로맨스 장르의 주인공이 기억상실에 걸리도록 한 뒤, 그럼에도 서로 사랑하고 함께 하기를 계속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주역인 두 사람의 깊은 사랑을 더 강조하기도 합니다.
창작 속 기억상실증은 판타지?
2004년 영화인 <첫 키스만 50번째>의 여주인공 루시는 교통사고 후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렸다는 설정으로 등장합니다. 루시는 1년 전 있었던 교통사고로 머리를 크게 다쳤고, 그 이후로 단 하루의 시간만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교통사고가 있던 날인 10월 13일 일요일 시점으로 기억이 리셋되는 것입니다. 영화는 이런 루시에게 첫눈에 반한 남자 헨리와 하루가 지나면 헨리를 잊는 루시가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그려냅니다. 헨리는 하루가 지나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루시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매일 새롭고 독창적인 방법으로 그녀에게 다가갔고, 언제나 첫 만남인 것처럼 사랑을 표현합니다. 계속 잊고 다시 시작하는 사랑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사랑이 이루어지는 간절하고 신선한 로맨스를 보여주는 인상 깊은 영화입니다.
2001년 한국에서 개봉한 스릴러 영화 <메멘토>는 너무나도 유명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2000년 작품입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 레너드는 어떠한 사고로 뇌에 손상을 입은 뒤 선행성 기억상실증에 걸려, 사고 이전은 기억하지만 사고 후에는 10분마다 기억을 잃습니다. 아내를 성폭행하고 죽인 범인, '존 G'라는 인물을 쫓고 있지만, 아내가 죽었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기억하기 어려워 각종 정보들을 이곳저곳에 다양한 방식으로 표시해 두면서 복수를 위한 수사를 이어가는 주인공 레너드의 이야기가 <메멘토>의 주된 줄거리입니다. 10분이라는 짧은 시간만 기억할 수 있는 주인공의 혼란스러운 감정을 표현하듯 영화의 진행 순서를 뒤죽박죽으로 바꿔 놓은 연출과 놀라운 반전으로 호평을 받은 영화입니다.
2022년 개봉작인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는 일본에서 2020년, 한국에서는 2021년에 출간된 동명의 로맨스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로맨스 영화로, 자고 일어나면 그날 있었던 일을 전부 잊어버리는 선행성 기억상실증을 가진 소녀 마오리와, 그녀와 조건부 연애를 하게 된 소년 토오루가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고등학생 소년 소녀의 로맨스를 보여주고 있으며, 동시에 마오리의 말과 행동, 습관 등을 통해 기억 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의 불편함과 힘든 점을 알게 해 줍니다. 또 기억상실증의 자연적인 치유나, 마오리가 기억나지 않는 토오루를 자신의 의지로 기억해 내고자 하는 장면, 기억은 잃었어도 무의식에 남아 있는 감각이나 감정의 역할 등을 통해서 한층 감동을 주어 많은 사람들을 울게 한 영화입니다.
이처럼 영화 등에서 소재로 사용되는 기억상실증은 창작자의 고증과 신중함에 따라 상당히 정교하고 현실적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종종 평소에 아무런 문제 없이 잘 지내던 사람이 교통사고 등의 사고로 받은 물리적 충격으로 갖고 있던 모든 기억을 잃었지만 뇌에 손상을 입은 것은 아니라는 것처럼 창작에서만 가능한 판타지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현실의 기억상실증
현실에서, 기억상실증은 크게 기질성과 심인성으로 나뉩니다.
기질성 기억상실은 사고나 부상, 뇌졸중이나 치매와 같은 퇴행성 뇌질환, 뇌전증(간질) 등 질환으로 인한 실제적인 뇌 손상 때문에 발생하는 기억상실 증상을 말합니다. 앞서 소개한 영화 <메멘토>의 주인공, 레너드의 모티프가 되는 실제 인물인 가명 H.M.은 유명한 기질성 기억상실증 환자입니다. H.M.은 뇌전증 치료 목적으로 뇌의 측두엽 부분을 절제하는 수술을 받았는데, 수술 중 측두엽 안쪽에 위치한 해마(hippocampus)까지 제거하게 되면서 기억상실을 얻었습니다. 수술 전의 과거는 기억하지만 수술 이후의 일은 30초 이상 기억하지 못하는 선행성 기억상실 증상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뇌가 실제로 손상을 입으면서 나타나는 기억상실이 바로 기질성 기억상실입니다. 물론 기질성 기억상실이 모두 선행성인 것은 아닙니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역행성 기억상실도 나타날 수 있으며, 이는 사람마다 각기 다릅니다.
심인성 기억상실은 뇌 손상과는 무관하게 심리적 충격이 원인으로 발생한 기억상실을 말합니다. DSM-5에서는 이를 해리성 기억상실증이라고 하며, 해리성 장애의 범주에 속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해리성 장애는 보통 어린 시절에 당한 여러 유형의 범죄나 폭행, 학대를 비롯한 정신적 외상-트라우마나 과도한 스트레스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입니다. 심인성 기억상실은 보통 과거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역행성 기억상실로 나타나지만, 과거의 모든 기억이 아닌 심리적으로 충격을 받은 그 사건만 잊는 경우가 일반적입니다. 범죄 수사 장르나 스릴러 등의 등장인물이 스토리의 중심이 되는 큰 사건에 연루된 인물이고, 그 때의 정신적 충격으로 기억이 없거나 애매한 상태라는 설정은 제법 흔한 설정입니다.
앞 문단에서 소개한 세 가지 작품들의 경우, 기억상실증을 상당히 현실적으로 묘사하는 작품들입니다. <메멘토>는 주인공을 실제 기억상실증 환자를 모티프로 한 것의 영향인지, 기억상실의 의학적 증상을 훌륭하게 보여줍니다. 많은 의학자들이 <메멘토>는 기억상실증을 다룬 영화 중 실제 환자의 모습을 가장 잘 고증한 영화라고 평가합니다. <첫 키스만 50번째>,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두 개의 작품은 모두 기억상실을 앓는 주인공이 하루를 주기로 기억을 잃습니다. 특정한 사건 이후 과거의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설정의 인물이 주를 이루다, 이렇게 특정한 주기로 있었던 일을 잊는 인물이 처음에는 신선했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것을 더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기질성 기억상실증은 이렇게 일어나는 사건을 기억에 장기적으로 저장하지 못하고 그때 그때 잊는 선행성 기억상실증인 경우가 자주 있는 편이고, 모종의 충격으로 이제까지의 모든 일을 잊는 일은 현실에서는 좀처럼 없는 일입니다. 때문에 이 두 가지 작품은 오히려 기억상실증에 대해 현실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