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기억을 하는 원리
우리가 정보를 반복적으로 접하면 그것이 기억에 도움이 된다는 통념이 있습니다. 이것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지만, 기억의 원리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연구원인 Richard Atkinson과 Richard Shiffrin 은 기억의 근본적인 원리를 설명하는 중다저장 모형 (multi-store model)이라는 이론을 정립했습니다. 이 이론은 기억을 세 가지로 분류하고 어떤 것에 대한 정보를 얻은 뒤 기억하고 유지하는 전반적인 과정을 설명합니다. 기억 연구 분야에서 정설로 인정받는 중다저장 모형에서는 감각 기억, 단기 기억, 장기 기억의 세 가지 종류를 통해 기억의 원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감각 기억은 시각이나 청각 등 감각 기관에 존재하는 기억으로, 다양한 정보를 받아들여 기억이라는 과정을 시작하도록 합니다. 감각 기억의 지속 시간은 매우 짧습니다. 시각으로 받아들이는 영상 기억은 0.5초 이하, 청각으로 받아들이는 음향 기억은 2~3초 정도만 남았다 사라집니다. 기억이라고 칭하기엔 너무나 순간이기에, 감각 기억은 감각 등록기라고 부르기도 합니다.단기 기억은 감각 기억으로 들어 온 정보 중에서 선택받은 정보를 잠시 붙잡아 두는 기억입니다. 종종 단기 기억이라는 말을 몇 년, 몇 십 년이 아닌 하루 이틀 후 잊어버리는 기억이라는 의미로 쓰곤 하는데, 중다저장 모형에서 말하는 단기 기억의 지속 시간은 대략 20~30초 정도입니다. 이 단기 기억의 용량은 평균 7개 정도라고 알려지는데, 하나의 항목 단위가 아닌 여러 항목의 정보를 담은 묶음 단위이기 때문에 한 묶음 안에 담기는 항목의 수에 따라 얼마든지 용량이 증가할 수 있다는 것이 특징입니다.장기 기억은 단기 기억의 정보를 여러 번 되뇌면 넘어가는 기억 영역입니다. 이 되뇜을 시연이라고 합니다. 받아들인 정보를 단기 기억이 지속되는 20~30초 안에 여러 번 반복하여 보면 그 정보는 절대 잊혀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표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연구자들은 장기 기억의 지속 시간은 영구적이며, 용량은 무제한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리 머릿속에 단단히 기억한 것도 시간이 지나면 기억나지 않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지속 시간이 영구적이라는 말의 의미는 모든 정보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영원히 잊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장기 기억으로 저장된 정보들이 사라진다는 증거가 없을 뿐입니다. 여러분 모두 당장에 기억할 수 없는 정보라도 그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면 떠올리는 것이 가능한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즉, 기억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 정보를 보관한 장기 기억에서 인출하기를 실패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중다저장 모형에 기반한 기억의 종류
기억을 연구하는 연구자들은 중다저장 모형을 기반으로 기억의 종류를 더 세분화하고 이론을 확장시켰습니다. 심리학자 Fergus Craik와 Robert Lockhart는 해당 이론과 다른 별도의 기억모형을 제안했습니다. 그들의 이론은 끝내 일부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어 인정받지 못했지만, 단기 기억을 장기 기억으로 바꾸는 시연의 세분화를 하는 데서 성과를 얻었습니다. 이들로 인해 시연은 유지 시연과 정교화 시연으로 분류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유지 시연은 단순한 반복 혹은 되뇜으로, 암기를 할 때 기계적으로 반복하여 읽거나 쓰는 것을 말합니다. 정교화 시연은 외우고자 하는 내용의 의미를 파악하거나 자신의 경험과 연관시켜 암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미국 뉴욕대학의 심리학자 Alan Baddleley는 중다저장 모형의 수정과 발전을 목표로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이 연구에서 그는 단기 기억에 대한 개념을 더 구체적으로 수정했습니다. 단기 기억은 정보가 잠시 머물기만 하는 장소가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정보들을 받아들이고 처리하며 동시에 의사결정까지 담당하는 곳이라고 설명하고, 그 명칭을 작업 기억으로 수정하기를 주장했습니다. 이 주장이 인정되면서 현재는 작업 기억이라는 표현이 더 대중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장기 기억을 다양하게 구분하는 시도도 이루어졌습니다. 장기 기억은 먼저 명시 기억과 암묵 기억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명시 기억은 친구와 수다를 떨다 헤어져 집에 돌아오는 길에 문득 마저 못한 말이 떠올라 전화를 걸어 전달하는 것과 같이, 의도적이고 의식적으로 알고 있으며 당장 언어로 표현이 가능한 것을 의미합니다. 암묵 기억은 흔히 말하는 데자뷔 현상을 설명해 주는 것으로, 본 적 있는 그림과 비슷한 그림을 보면서 분명 어디서 본 것 같은데 확실히 생각 나지 않는 것과 같은 기억입니다. 내가 원할 때 말로 당장 표현되지 않으나 그와 비슷하거나 관련 있는 정보를 접하면 알아차리는 것이 암묵 기억입니다.장기 기억은 서술 기억과 절차 기억으로도 구분할 수 있습니다.서술 기억은 언어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기억으로, 다시 의미 기억과 일화 기억으로 구분합니다. 의미 기억은 누군가의 생일이나 기념일 같이 객관적인 사실이나 지식을 말하며, 일화 기억은 과거 경험했던 여행과 같이 이야기로 풀어낼 수 있는 기억을 말합니다.절차 기억은 몸이 기억하는 운동 기억입니다. 어릴 때 배운 수영이나 한참동안 타지 않은 자전거를 수년 혹은 십년 이상 시간이 지나도 적응 시간만 잠깐 주어진다면 얼마든지 다시 예전의 실력을 보여줄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합니다. 절차 기억은 소뇌에 저장되는 기억으로, 대뇌에 저장되는 다른 기억들과 달리 쉽게 망각이 일어나지 않고 기억상실증과도 무관한 것이 특징입니다. 또 언어와는 무관한 소뇌에 저장되기 때문에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시범을 보여주는 것이 더 표현하기 쉽다는 특징도 있습니다.
효과적인 시험공부 방법이란
시험을 위해 책을 읽다 보면 기억해야 할 엄청난 양의 정보에 압도당하기 쉽습니다. 영화, 드라마, 또는 만화, 소설 등에서 등장하는, 한 번만 보면 작고 사소한 부분까지도 절대로 잊지 않는 것과 같이 완벽한 기억 능력을 가진 캐릭터에 대해 부러움의 순간을 경험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기억은 시험을 위해 공부하든, 식료품점에서 필요한 것을 회상하든, 심지어 걷는 법이나 먹는 법을 아는 것이든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초석입니다. 하지만 여러 번 고민해 보아도, 영어 어휘나 복잡한 수학 방정식을 암기하는 것은 자전거를 타는 방법을 기억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활동처럼 느껴집니다. 앞선 설명들로 우리는 기억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 조금 더 이해하였기 때문에, 이제 왜 시험공부를 하며 겪는 기억과 자전거를 타기 위한 기억이 서로 다르게 느껴지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마다, 그리고 그 내용이나 분야마다 기억하기에 더 좋은 방법이 모두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효과적인 시험공부 방법도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계속 반복해서 외우려고 시도하면서 머릿속에 밀어 넣는 것이 더 나은 과목이라면 지루하더라도 장기 기억에 남을 때까지 유지 시연을 이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본인이 할 수 있고 시간의 여유가 있다면, 단순 암기보다는 그 의미를 이해하고 연관된 다른 정보나 경험을 탐색하면서 정교화 시연을 시도해 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